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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819] 바둑에서 왜 ‘승부수’라 말할까

2026-06-20 06:24:31

왕싱하오 9단이 16일 제31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 최종국에서 착수하고 있다. [한국기원]
왕싱하오 9단이 16일 제31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 최종국에서 착수하고 있다. [한국기원]
스포츠 기자 초년 시절, 스포츠 기사로 쓰는 말을 집중적으로 배울 기회가 있었다. 당시 배운 용어 중 하나가 ‘승부수(勝負手)’라는 표현이다. 사실 기자가 되기 이전에는 이 말을 별로 쓸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스포츠 기사에선 중요 승부처에서 판도를 좌우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많이 사용했다.

승부수는 원래 바둑이나 장기 등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에 마지막 결단으로 두는 수라는게 사전적 정의이다. 승부수(勝負手)의 어원은 비교적 분명하다. 이기고 진다는 의미인 ‘승부(勝負)’와 바둑에서 돌을 놓는 한 번의 착수라는 의미인 ‘수(手)’가 결합한 말이다. 문자 그대로는 ‘승부를 가르는 수’, ‘승패를 결정짓는 착수’라는 뜻이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승부수라는 검색을 하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적어도 조선시대 문헌에서 널리 쓰인 용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현재 확인되는 자료로는 승부수가 고전 문헌어라기보다 근대 이후 바둑계에서 정착한 전문용어라고 봐야할 것이다. 현대 바둑 용어 상당수는 근대 일본 바둑계의 영향을 받았다. ‘정석(定石)’, ‘포석(布石)’, ‘사활(死活)’, ‘형세(形勢)’, ‘착수(着手)’ 등 많은 용어가 근대 동아시아 바둑계에서 정리됐다. 승부수(勝負手) 역시 일본 바둑에서 쓰이는 ‘쇼부테(勝負手)’와 같은 한자 표기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용어라기보다 근대 이후 한·일 바둑계에서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본 코너 1803회 ‘바둑에서 왜 ‘정석’이라 말할까‘, 1810회 ‘왜 바둑에서 ‘포석(布石)’이라고 부를까‘, 1812회 ’바둑에서 왜 '착수(着手)'라는 말을 쓸까‘ 참조)
우리나라 언론은 1960년대부터 바둑 기사에서 이 말을 쓰기 시작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동아일보 1966년 2월11일자 ‘趙南哲(조남철)10年王國(년왕국) 무너뜨린 조용한新風(신풍)= 金寅(김인)5段(단)’ 기사에서 중반 막바지에서 던진 金 5단의 승부수를 시간에 쫓긴 趙 8단이 잘못 응함으로써 결국 형세가 역전되고 말았다‘고 전했다. 근대 바둑계에서 정착한 이 말은 정치·경제·사회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오늘날의 비유적 표현이 됐다. 정치인의 결단을 두고도 승부수라 하고, 기업의 대담한 투자나 스포츠 감독의 과감한 선택을 두고도 승부수라고 말한다. 심지어 개인의 진로 변경이나 이직, 창업과 같은 인생의 선택에도 이 표현을 사용한다.

바둑은 흔히 정적인 게임으로 여겨진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말없이 돌을 놓는 모습은 격렬한 경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바둑의 본질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돌 하나를 놓는 순간 수많은 가능성이 열리고 닫힌다. 어떤 수는 현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어떤 수는 먼 미래를 위한 투자다. 그리고 때로는 모든 계산을 넘어 판 전체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한 수가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승부수다.

승부수라는 말 속에 동아시아 사유의 특징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서양의 체스가 상대 왕을 쓰러뜨리는 결정적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면, 바둑은 판 전체의 형세를 읽는 게임이다. 승부수 역시 단순한 공격 기술이 아니라 흐름을 바꾸는 행위다. 이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연결된다. 인생은 한 번의 승리나 패배로 결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흐름이며, 때로는 과감한 선택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다.

승부수는 단순히 강한 수가 아니다.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는 수에 가깝다. 형세가 불리할 때는 물론이고, 우세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국면을 열기 위해 던지는 도전이다. 바둑 기사들은 종종 "이 수가 통하면 이기고, 통하지 않으면 진다"고 말한다. 승부수란 바로 그런 수다. 현재의 안정을 포기하는 대신 미래의 가능성에 자신을 거는 행위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은 일상적인 결정들이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계산만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갈림길에 선다. 익숙한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새로운 길을 택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바둑 기사처럼 자신의 승부수를 고민한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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