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준(오른쪽) 9단이 14일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 제1국에서 돌을 놓고 있다. [한국기원]](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606150713100202705e8e94108711823512112.jpg&nmt=19)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실착(失着)’이라는 표현이 낯설 수 있다. 축구에서는 실수, 야구에서는 실책, 체스에서는 블런더(blunder)라고 하는데, 바둑에서는 "이 수는 실착이었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실착은 한자어로 '잃을 실(失)'에 '둘 착(着)'을 쓴다. 직역하면 ‘잘못 둔 한 수’ 또는 ‘가치를 잃어버린 착점’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手)'가 아니라 '착(着)'이라는 점이다.
이 용어는 바둑에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원래 중국의 기예(棋藝) 용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바둑(围棋)에서도 ‘失着(shīzh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일본 바둑계에서도 한자어 ‘失着(しっちゃく, shicchaku)’가 쓰였다. 한국 바둑계는 전통적으로 중국·일본 기원의 한자 바둑 용어를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실착이라는 말이 정착했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실착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국역 16회, 원문 69회 등 총 85개가 나온다. 조선시대부터 써 왔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둑 용어가 아닌 실수라는 의미의 의미로 사용했던 것이다. 바둑 용어로 실착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동아일보 1938년 3월8일자 ‘先手權(선수권)을逸機(일기)한黑(흑) 無遠慮必有近憂(무원려필근우) 輕(경)한失策(실책)이影響至大(영향지대)’ 기사에 실착이라는 말이 나온다. 기사 제목 안에 ‘失策(실책)’은 실착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바둑에서 실착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전체 판세의 흐름 속에서 부적절한 착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계산 착오로 돌을 잡히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형세 판단을 잘못해 손해를 보는 곳에 둔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 수가 최선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담겨 있다.
이 때문에 프로 기사들의 해설을 들어보면 "여기서는 흑의 실착이 나왔습니다"라고 표현하지 "흑이 실수했습니다"라고 단정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상대의 판단 과정을 존중하면서도, 수의 객관적 가치를 평가하는 바둑 문화가 반영된 언어라고 볼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면서 실착이라는 용어는 더욱 자주 사용된다. 과거에는 우열이 애매했던 수들도 이제는 AI의 승률 그래프를 통해 정량적으로 평가된다. 승률이 몇 퍼센트씩 떨어지는 순간을 가리켜 "실착이 나왔다"고 말하는 장면이 흔해졌다. 그만큼 실착은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객관적 분석의 언어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바둑은 인생과도 닮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택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선택이 좋은 수였는지 나쁜 수였는지 알게 된다. 바둑에서 '실수'보다 '실착'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한 수를 평가하는 것. 결과를 인정하되 사람을 탓하지 않는 것. 실착이라는 두 글자에는 오랜 바둑 문화가 축적해 온 냉정함과 품격이 함께 담겨 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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