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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773] ‘당구(撞球)’는 왜 ‘옥돌(玉突)’로 불리었을까

2026-05-03 07:26:27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이 즐겼다는 '옥돌대 2대' [대한당구연맹 홈페이지 캡처]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이 즐겼다는 '옥돌대 2대' [대한당구연맹 홈페이지 캡처]
오늘날 자연스럽게 '당구(撞球)'라 부르지만, 한때 ‘옥돌(玉突)’이라는 다소 시적인 이름으로 불린 시절이 있었다. 대한당구연맹(KBF) 홈페이지 당구 소개에 따르며 당구는 의료선교사 였다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호레이스 알렌’이 1884년 9월에 인천에 처음으로 당구대를 설치한 것이 우리나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데, 1912년 창덕궁에 ‘옥돌대(玉突臺)를 2대 설치하여 순종임금께서 즐겼다고 하며, 고종과 영친왕까지도 이러한 ’옥돌‘에 제법 심취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본 코너 1771회 ‘‘ 빌리어드(billiards)’를 왜 ‘당구’라고 부를까‘ 참조)

옥돌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때도 ‘당구’라는 말과 함께 사용됐다. 조선일보 1929년 2월7일자 ‘세계당구대회(世界撞球大會)’ 기사는 ‘세계당구(世界撞球)(옥돌(玉突))계(界)의 육대선수백이의(六大選手白耳義)의『올맨』독일(獨逸)『아히켄·랏시아』미국(米國)의『고크란·섬』불란서(佛蘭西)의『크란쉬』일본(日本)익송산씨등(松山氏等)을 모아논『뽀―구라인』세계선수권경기대회(世界選手權竸技大會)는 사일(四日)부터 당지(當地)에서관(關)한바 당일(當日)은『올맨』대송산시합(對松山試合)이 잇서 송산씨(松山氏)는 최초(最初)부터 잘처서 제십육회(第十六回)째에 손쉽게규정(規定)의 사백점(四百點)을처서 강적(强敵)에 대승(大勝)하야 대기토(大氣吐)을냇더라 【뉴욕사일발전(四日發電)】’고 전했다. ‘당구’ 옆에 괄호를 달고 ‘옥돌’을 병기한 이 기사는 단순한 번역 이상의 시대적 풍경을 담고 있다. 오늘날에는 사라진 말 ‘옥돌’은 어떻게 세계 스포츠의 언어와 나란히 놓이게 되었을까.
당시 당구공은 지금처럼 합성수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상아나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져, 광택과 질감이 마치 옥을 연상시켰다. 매끄럽고 은은하게 빛나는 그 구형의 물체는 조선인들의 감각 속에서 ‘옥(玉)’으로 번역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돌(突)’, 즉 ‘치다’라는 동작이 더해지면서 ‘옥을 친다’는 의미의 표현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대(臺)’, 곧 탁자이니 ‘옥돌대’는 당구대 전체를 설명하는 이름이 된다.

하지만 이 명칭은 단순한 직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옥’은 조선 사회에서 단순한 광물이 아니라, 고귀함과 품격, 절제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물질이었다. 그런 옥을 빌려 서양의 유희를 설명했다는 것은, 새로운 문물을 낯설지 않게 만들기 위한 문화적 번역의 시도였다. 낯선 것을 그대로 들여오기보다, 익숙한 개념 속에 담아 이해하려는 태도—그것이 바로 ‘옥돌’이라는 이름에 담긴 시대의 감각이다.

이처럼 근대 초입의 조선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재해석하고 있었다. 커피를 ‘양탕국’이라 부르고, 빵을 ‘면포’라 부르던 시절처럼, 당구 역시 ‘옥돌’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이는 단순한 오역이나 어색한 번역이 아니라, 외래 문화를 자기식으로 소화하려는 창조적 대응이었다.

결국 ‘옥돌’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당구’라는 명칭이 자리 잡았지만, 그 짧은 이름 속에는 한 시대의 문화적 긴장과 호기심이 응축돼 있다. 낯선 세계를 마주한 사람들이 어떤 언어로 그것을 이해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덧붙이고 무엇을 덜어냈는지 보여주는 작은 단서다.

오늘날 당구공을 굴릴 때마다 떠올리기 어려운 이름, ‘옥돌’. 그러나 그 단어는 여전히 묻고 있다. 지금 들어오는 새로운 것들을 과연 어떤 언어로, 어떤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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